유전 지대에서 해상풍력 메카로…북해의 대변신

2024-08-05

풍력 발전 터빈을 바다 한가운데 설치하면 소음 문제에서 벗어나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또한 지난 수년간 해상 풍력 발전 비용이 크게 하락하면서 태양광, 육상풍력 다음으로 저렴한 재생에너지원이 되었다.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해상 풍력 발전’을 에너지 전환의 주요 축으로 삼고 있는 이유다

[한경ESG] 유럽 ESG 최전선

2023년 12월 20일 덴마크의 에너지 기업 오스테드가 영국 북해 연안에 위치한 노퍽주에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풍력발전 단지 건설을 발표했다. 2027년 완공 예정으로, 향후 330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럽 내 ‘해상풍력의 메카’로 자리 잡은 북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북해경제(new North Sea economy)’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

주춤했던 재생에너지 산업, 다시 탄력받나

오스테드가 영국 북해 연안에 건설할 예정인 세계 최대 풍력 단지는 ‘혼시3’라는 프로젝트로 알려졌다. 현재 영국 정부가 추진 중인 탄소중립을 위한 재생에너지 전환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영국은 지난 2019년 기후변화법 개정안을 통해 세계 최초로 ‘2050 탄소중립’ 목표를 법에 명시했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해상풍력을 50GW 규모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혼시 프로젝트’다. 이미 혼시 1과 혼시 2 프로젝트는 요크셔 해안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혼시 1은 1.2GW, 혼시 2는 2.4GW 규모이며, 둘을 합쳐 영국 내 230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2022년부터 가동한 혼시 2는 세계 최대 풍력발전소다.

오스테드는 혼시 1과 2 프로젝트를 맡아 건설했으며, 지난 12월 20일 혼시 3 추진도 맡기로 최종 결정했다. 231개 해상 터빈을 건설하는 데 투자 비용만 80억 파운드(약 13조2000억원)에 달한다. 회사 설립 이래 최대 투자 규모로, 그만큼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다. 2.9GW 생산이 목표이며, 완공되면 혼시 2를 넘어 세계 최대 풍력발전소가 될 예정이다.

하지만 오스테드가 혼시 3 추진을 맡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팬데믹에 이은 전쟁 등으로 공급망에 차질을 빚은 데다 인플레이션까지 심화되면서 풍력발전소 사업성이 낮아진 영향이 컸다. 실제 오스테드는 이 같은 이유로 최근 미국 뉴멕시코 풍력발전 프로젝트를 백지화한다고 발표했다.

이 와중에 오스테드의 경쟁사라 할 수 있는 스웨덴의 국영 에너지 기업 바텐폴 또한 영국 노퍽주 보레아스의 풍력발전소 건설 계획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철강 같은 자재비가 상승하는 등 시장 여건이 바뀌면서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혼시 3 역시 추진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던 중이었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오스테드가 혼시 3에 대한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영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오스테드 관계자는 “지난 3월 프로젝트 사업성과 관련해 의구심을 제기했고, 금리 상승과 공급망 붕괴 등으로 인한 비용 급증에 대처할 수 있도록 영국 정부에 더 많은 지원을 요청했다”며 “이 프로젝트는 2022년 7월 영국 정부와 계약을 체결한 5개 프로젝트 중 하나로, 자본 지출 계약 대부분이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기 이전에 이뤄져 경쟁력 있는 가격을 확보했다는 것에 자신감을 갖고 투자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가 재생에너지 확충을 위해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 가격을 올리려는 것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유럽 국가들, 북해 풍력발전소 대폭 확대

이번 오스테드의 영국 북해 풍력발전소 건설로 다시 주목받는 지역이 있다. 유럽 내 해상풍력 산업 중심지 ‘북해(North Sea)’다. 북해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데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이다. 평균 풍속이 초속 10m에 이른다. 하지만 이 거친 바람이 해상풍력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강력한 바람을 이용해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해는 바닥이 부드러운 편이다. 풍력발전 터빈을 해저에 고착시키는 데 유리하다. 수심도 대체로 90m를 넘지 않는다. 그만큼 풍력발전기를 해안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바람은 더 고르고 안정적으로 분다. 유럽 내 국가들이 ‘바다 위 유전’이라 불리는 북해로 몰려드는 이유다.

2023년 4월, 유럽 내 9개 국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북해를 ‘유럽 최대 친환경 발전소’로 만들겠다는 선언문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참석했다. 이 밖에 벨기에, 네덜란드, 아일랜드, 덴마크, 룩셈부르크 총리도 함께 자리했다. 노르웨이 총리와 영국의 에너지안보 장관도 벨기에 오스탕드에서 열린 정상회의를 통해 바다에 연결된 재생에너지발전소를 개발하는 데 힘쓸 것을 약속했다.

유럽은 ‘탄소중립’이라는 목표 외에도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재생에너지 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9개 국가는 북해 해상풍력 발전용량을 2030년까지 120GW, 2050년까지 300GW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유럽 에너지 시장이 혼란에 빠지고 3개월 후인 2022년 5월 4개국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목표의 2배에 달하는 발전용량이다. 지정학적 위기로 인해 ‘안정적 에너지원 확보’가 국가경쟁력에 그만큼 중요해지고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각국 정상은 이를 위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를 통해 유럽 내 인프라가 구축되면 전기 생산은 물론,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실제 유럽 내 각국은 해상풍력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해상풍력발전 단지에 연결된 유럽 최대 규모의 국가 간 전력 연결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은 현재 45개 해상풍력발전소에서 14GW를 생산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용량을 50GW로 확대할 방침이다. 독일은 30개에서 8GW를 생산하고 있으며, 네덜란드가 2.8GW, 덴마크와 벨기에가 2.3GW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프랑스는 2050년까지 40GW로 대규모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상풍력 에너지가 2030년부터 2050년까지 태양에너지와 육상풍력발전소를 훨씬 앞지르는 재생에너지 생산의 주요 원천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북해로 향하는 기업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023년 첫날 ‘북해가 유럽의 새로운 경제 중심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북해는 벨기에, 영국,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6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유럽 내 주요 국가 간 많은 해상 항로가 교차하는 만큼 항상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20세기에는 북해의 해저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었다. 1990년대 전성기 시절 북해 최대의 산유국이던 영국과 노르웨이는 하루에 6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북해가 마주한 ‘경제적 기회’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내 국가들은 이곳 북해에서 생산되는 풍력발전 용량을 2050년까지 300GW로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현재 이곳에서 생산되는 발전용량은 30GW 수준이다. 향후 30년 내 산업 규모가 10배 이상 확대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대규모 전력은 유럽 내 가정과 산업시설에 공급하게 된다. 대규모 풍력발전을 중심으로 북해가 새로운 성장산업 지대로 변모하고 있다. 신북해경제의 시작이다.

이 같은 ‘북해의 변신’을 보여주는 대표적 도시가 있다. 덴마크 남서부 연안에 자리한 항구도시 에스비에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작은 농장 지역이던 이곳은 1990년대 해저유전을 발견하면서 석유가스전 개발 사업의 요충지가 됐다. 에스비에르가 ‘해상풍력의 중심지’로 다시 한번 변신하는 데 성공한 것은 1991년이다. 오스테드가 이곳에 11개 풍력터빈으로 구성된 해상풍력발전소 ‘빈데비’를 세계 최초로 선보인 것이다. 이후 이곳에는 해상풍력발전용 설비 제조업체가 몰려들었고, 그만큼 투자금도 많이 모였다. 오늘날 유럽에 설치된 해상풍력발전 설비의 80% 이상이 바로 이곳 에스비에르에서 출하될 정도다.

탄소 저장소, 데이터센터 최적지로도 주목

탄소포집 및 활용·저장(CCUS) 기술과 관련해 북해는 가능성이 무한한 지역이다. 탈탄소화가 어려운 대표 산업인 시멘트 제조나 화학 등을 중심으로 최근 들어 탄소포집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공기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보관할 장소가 필요하다. 북해의 고갈된 가스전이 이렇게 포집된 이산화탄소를 보관하기에 적절한 장소로 거론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노르웨이는 고갈된 북해 가스전에서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저장하는 인프라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대규모 전력 공급원을 찾아 유럽 내 데이터센터도 북해로 모여들고 있다. 저렴한 가격에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추운 기후 덕분에 값비싼 냉각 시스템을 사용하는 대신 외부 공기를 순환하는 것만으로 데이터센터의 뜨거운 열기를 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이 에스비에르 같은 북유럽 도시에 부지를 확보하고 서버를 구축하는 등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대표적 에너지 집약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자동차 배터리 제조업체 등이 북해 지역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독일의 대표적 기후 보호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의 프랑크 피터 수석연구원은 “풍부한 에너지는 새로운 산업을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는 만큼 북해가 유럽 경제에 미칠 영향은 매우 엄청날 것이다”라며 “유럽의 경제 중심지가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정치 중심지도 북쪽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출처:유전 지대에서 해상풍력 메카로…북해의 대변신 (hankyung.com)